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말 압델 나세르 (문단 편집) == 임기 후기 == ||[[파일:8ba7785455e799262e1d57e9b6af4bec.jpg|width=400]] || [[파일:체세르.jpg|width=450]] || ||[[야세르 아라파트]](왼쪽)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을 접견하는 가말 압델 나세르(오른쪽). || 1966년 카이로에서 알리 사브리(오른쪽)와 함께 [[체 게바라]](왼쪽)을 만난 가말 압델 나세르(중간).[* 알리 사브리(Ali Sabri)는 당시 나세르 정권의 총리였다.] || [[1962년]] [[북예멘 내전]]에 개입해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고 많은 [[이집트]] 군대를 보내 공화파를 도왔다. 1967년 시리아와 대 이스라엘 포위진을 짰으나 많은 군대가 [[예멘]]에 묶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패배해 [[시나이 반도]]를 상실한다. 이것이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나세르의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대해 이스라엘의 국가 승인 불가, 이스라엘과의 교섭 불가, 이스라엘과의 화평 불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 회복을 내세우며 강경노선을 택했다. 한편 나세르는 도피 중이던 [[나치 독일|나치]]의 [[전범]]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업무는 [[이집트군]]과 정치기구의 양성, 그리고 [[반유대주의]] 선전물 작성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집트 정보국에서 반이스라엘 선전을 담당한 전 나치당의 선전활동가인 요한 폰 레르스(Johann von Leers)와 이집트 국가정치국에서 활동한 전 [[게슈타포]]의 간부인 레오폴트 글라임(Leopold Gleim)이 있다.[* 그 밖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진압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도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이 정당해산 명령을 받게되자 이집트로 잠시 도피해 오기도 하였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는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1960년대 [[이스라엘]] 정부는 이집트가 [[독일 국방군|독일군]]의 과학기술을 입수해 로켓 개발을 하는 것을 꽤나 우려했다고 하며, 나치의 과학자로 일하며 로켓 개발을 담당했던 자를 이집트에 스파이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나세르는 나치에 적대적인 소련과도 우호 관계였기 때문에 나치 간부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소련]]과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구권 및 공산국가들의 협력을 얻어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지만, 국내에선 [[수에즈 운하]]의 수입이 줄어들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경기침체가 발상했다. 그러던 중 1970년 9월 28일에 불과 52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는 6일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로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의 패배를 목격하고 실의에 빠졌으며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원복]]의 [[가로세로 세계사]] 3권에서는 끝내 이스라엘을 못 꺾고 죽다니라고 원통해하면서 사망하는 걸로 묘사되지만 역사적으로는 정확하지 않다.] 여기에 반발한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대규모 테러를 자행하면서([[검은 9월]] 참고) 이스라엘이 아니라 중동 전체를 개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나세르의 혈압을 올리고 있었고 나세르는 인생 말년에 중동 지도자들을 화해시키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67년 이래로 심장병을 앓아온 나세르는 이미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무리하게 정상회담에 나서 아랍 정상들 간의 관계를 중재하느라 크게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리고 9월 27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PLO]] 등 아랍 각국의 수장들을 모아놓고 화해를 호소한 후 [[쿠웨이트]]의 [[에미르]]를 환송한 직후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다음날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이집트는 물론 아랍 전체가 광란에 가까운 슬픔에 빠져들었으며[* 나세르와 사담 후세인의 평전을 쓴 바가 있는 팔레스타인 출신 저널리스트 사이드 K. 아부리쉬는 당시 미국에 있다가 라디오로 나세르의 죽음을 듣고는 패닉에 빠져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경찰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방금 내 가족이 죽었소."라고 대답했다고.] 그의 장례식에는 아랍 각국의 지도자들이 몰려들어 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 [[후세인 1세]]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고 나세르를 자신의 정치적 스승으로 여겼던 [[무아마르 카다피]]는 2번이나 기절했으며 나세르의 죽음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아라파트도 계속 흐느꼈다. 하지만 나세르와 소련의 밀월을 불편하게 여겼던 서방 국가들은 그의 죽음을 무시했고, 반면 소련에서는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을 파견하여 조문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수상은 그를 전쟁광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빈정대는 촌평을 남겼으나 [[이스라엘 아랍인|아랍계 시민]]들의 애도를 허용했다. 그의 후임으론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으며 안와르 사다트는 갈고 닦은 이집트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회치기 위해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상당히 선전했다. 이후 [[안와르 사다트|사다트]]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맺어 이스라엘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자 흥분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안와르 사다트|사다트]]를 암살했고, 그 뒤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잇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